---- - --- A대원으로부터 메세지가 도착했습니다 - -

제 목소리 들리나요? 후우, 그곳은.. 온통 망가진 회색만이 가득한, 황폐한 곳이었습니다. 발을 내딛을 때마다 자욱하게 퍼지는 먼지들.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이 녹슨 어떤 물질들…… . 더 볼 것도 없는 곳이었습니다. 이곳의 인간들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것일까요?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. 그렇게 한동안 눈을 찌푸리며 걷다가, 회색으로 가득한 이곳을 밝게 비추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. 긴 목을 쭉 빼서, 저를 궁금하게 한 그곳을 향해 걸어갔습니다. 그렇게 제 눈 앞에 보인 것은 한 손보다 조금 더 크고 빛나는 화면이었습니다.

거기서 저는 우리 인류의 기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. 그것이 담긴 메세지를 당신에게 보냅니다.

우리를 발견한 먼 미래의 당신을 위해 남기는 흔적,

몇년 전부터 아주 무서운 저주가 우리를 휩쓸고 있었다. 이 시대를 살고 있다면, 높은 확률로 걸리고 마는 저주였다. 피할 수 없었고, 초기에 알아챌 수도 없었다. 빛나는 화면을 가까이 할수록 저주는 커져갔다. 그렇다고 우리는 빛나는 화면을 멀리할 수도 없었다. 저주가 제 몸을 파먹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. 그런 무서운 저주였다. 걸리지 않으려고 갖은 노력을 했던 나도 결국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.
왜냐하면, 앞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. 목만..

거북목 사우르스의 흔적

저주 1일째
22년. △월 △일, 저주가 찾아온 날. 이 저주에 걸린 사람들은 시작과 증상이 모두 똑같았다. 빛나는 화면을 가까이 했고, 가까이 다가갔다. 허리는 자연스레 굽어졌고 어깨는 둥글어졌다. 하지만 초기에 알아챌 수 없었다. 항상 그렇게 살아오다가 어느 날 깨닫는 것이다.
내 목 좀 많이 나와있지 않나?
나도 그렇게 깨달았다. 여느 날과 다름없이 작지만 빛나는 모니터를 바라보다 문득 내 책상 옆에 있는 전신거울을 바라보게 되었고, 거기서 비친 내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. 그리고 그제서야 알았다. 나는....
이 이상한 저주에 걸려버렸구나!
저주 한달째
22년. ♢월 ♢일, 거북목 사우르스들. 이 저주에 걸린 이들은 거북목 사우르스라고 불렸다. 목만 앞으로 나온 우스꽝스런 모습이 퍽 공룡을 닮아 있었다. 그 목이 긴 공룡말이다. 저주가 확산되자.. 저주에 걸린 사람들, 거북목 사우르스들은 목이 어느정도 들어갈 때까지 모든 전자기기를 금지당했다. 앉아있을 때는 보조기구를 이용해 상반신을 꽂꽂이 세워야했다. 3일까지는 견뎠지만 그 이상은 고비였다. 얼마 되지 않아 거북목 사우르스들의 시위가 일어났다. 굽고 긴 목을 빼들고 전진하는 그 모습은 정말로,
공룡들의 무리 이동같았다.
저주 세달째
22년 ♦︎월 ♦︎일, 정화당했다. 저주에 극심해지자, 중증 거북목 사우르스들을 한데 모아놓고 일종의 정화의식을 진행했다. 말이 정화의식이지, 고문이 따로 없었다. 우리의 몸을 자유자재로 괴롭히고 버티게 해 강제로 목을 넣게 만들었다. 이정도 고통이면, 저주에 벗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. 벗어나야 했다. 이 고통을 두번 겪을 순 없었다. 하지만..슬프게도 실패했다. 의식을 받던 거북목 사우르스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정신을 잃는 사례가 속출했다. 그도 그럴게 이 정화의식을 받다가는, 목이 아니라 영혼이 먼저 사라질 것 같았다. 자꾸 갈비뼈를 열고 닫으라고도 하고 정수리를 당기라고도 했다. 우리의 몸은 사실 인간이 아니라 건담이었을까? 그렇게..
의문을 남긴 채 한달 만에 정화의식은 끝이 났다.
저주 3년째
거북목 사우르스들이 인류의 반을 넘어섰다. 이제 앞으로 나온 긴 목과 굽은 어깨는 너무나 일상이 되어버렸다. 저주는 너무나 견고했고 사람들은 저주에 적응해갔다. 긴 목을 위한 옷도, 패션 아이템도 생겼다. 그 어떤 정화의식도 저주를 풀 순 없었다. 저주를 푸는 단 한가지 방법이 있었으나, 지금 이 시대엔 불가능에 가까웠다.
이제 거북목 사우르스들은 새로운 종이 되어갔다.

이것이..마지막 메세지입니다. 우리 기원의 흔적을 찾아냈습...

아니, 아니군요. 가장 마지막에 하나가 더 남아 있었습니다. 마저 보내드리겠습니다.

82년, 실로 오랜만에 이 흔적을 발견해서 글을 쓴다. 저주는 이제 저주라고 불리지 않게 되었다. 우리는 새로운 인류의 기원이 될 것이다. 거북목 사우르스에서, 거북목 사피엔스로, 우리는 새로운 사피엔스들이다.
다만 궁금하다. 후에 우리들의 화석은 어떻게 보일까? 우리 사피엔스들은 언젠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? 비록 지금 우리는 긴 목과 굽은 어깨를 가지게 되었지만..이 흔적을 본다면 거북목 사우르스들의 한을 알아주길 바란다.우리의 죄는 앞으로 나아간 것밖에 없다고. 목만.
거북목의 흔적 다시보기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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